주간보호센터 노인 프로그램 기획: 어르신들이 진짜 좋아하는 것 (반장 선거)

최근 센터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특별한 이벤트로 '반장 선거'를 했습니다. 사실 센터에서 반장이 하는 일이라고는 별거 없거든요. 아침 송영 후 차렷, 경례 구령을 붙이는 것, 그리고 오늘 날짜를 화이트보드에 적어드리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를 하자고 하면 다들 손사래부터 치십니다. 귀찮다며, 할 일도 별로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쑥스러워하시거든요.

그래도 반장은 꼭 있어야 하기에 후보를 몇 분 추천받았습니다. 진짜 옛날 학교 반장 선거처럼요. 칠판에 이름을 적어놓고, 투표함도 그럴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르신 한 분 한 분 성함을 정겹게 불러드리며 종이에 O, X로 기표해서 넣으시게 했죠.


평생 처음 반장이 되신 어르신의 미소

후보 중에 체격이 참 좋으신 어르신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젊은 시절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사하시느라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분이었죠. 처음에 후보로 추천해 드렸을 때, 어르신은 손사래를 심하게 치셨습니다. 반장 같은 건 평생 해본 적도 없고, 옛날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녀서 이런 건 할 줄 모른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제가 곁으로 가서 넌지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한 번 꼭 해보세요, 어르신." 그랬더니 쑥스러워하시면서도 슬며시 미소 지으며 좋아하시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 결국 그 어르신이 새 반장님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전임 반장님께 완장을 전달받는 뜻깊은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전임 반장님이 새 반장님의 팔뚝에 노란 완장을 직접 채워주셨거든요. 다 함께 손뼉을 치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센터 전체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소중하고 예쁜 사진들이 지금은 다 남아있지 않아서 너무나 아쉬울 따름입니다.

참고로 전임 반장님은 막걸리를 무척 좋아하셔서 가끔 몰래 한 잔씩 걸치고 오시는 날이 있었거든요. 아침마다 꾸벅꾸벅 조시면서도 구령만큼은 기가 막히게 붙이시던 분인데, 그분이 진지하게 완장을 넘겨주시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뭉클하던지요.



반장선거후 완장을 차고 웃는 남자 어르신




어르신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치매 예방 프로그램

그날 반장 선거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평소 어떤 프로그램을 해도 무덤덤하시던 분들조차 그날만큼은 눈빛이 반짝이셨거든요. 내 이름이 불리고, 직접 투표용지를 넣고, 손뼉을 치며 완장을 채워드리는 그 과정 전체를 진심으로 즐거워하셨습니다.

나중에 가만히 복기해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어르신들의 '옛날 기억'이 소환된 거였어요. 까마득한 옛날, 학교 다닐 때 반장 선거를 하던 그 풋풋한 시절 말입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셨던 분도,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신 분도, 그날 하루만큼은 모두가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신 것 같았거든요.

복지 현장에서는 이런 것을 '회상 요법(Reminiscence Therapy)'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머리를 쓰게 하는 학습지나 인지 훈련 프로그램보다, 어쩌면 이렇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움직이는 활동이 치매 예방과 정서 안정에 훨씬 더 큰 효과가 있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계산을 풀게 하는 것보다, 좋았던 기억과 따뜻했던 시절을 잠시나마 다시 느끼게 해드리는 것. 그것이 어르신들의 마음에 훨씬 더 깊이 와닿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앞으로 센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는 이 방향으로 더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어르신들이 환하게 웃으실 수 있는 것, 옛 추억에 잠기실 수 있는 것, 그리고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실 수 있는 것들로요.


미뤄뒀던 노인 심리학 공부를 다시 꺼낸 이유

반장 선거를 치렀던 그날 이후로, 노인 심리에 대한 제 관심은 훌쩍 커졌습니다. 왜 이 평범한 선거 프로그램이 그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는지, 왜 옛날 기억이 소환되면 어르신들의 굳은 표정이 그토록 부드럽게 풀리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척 궁금해졌거든요.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뒀던 노인 심리학 공부를 슬슬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거창하게 당장 자격증을 따지는 않더라도, 관련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정독해 보는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며 내 부모님처럼 모시는 분들인데, 그분들의 닫힌 속마음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더 따뜻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날 완장을 차고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해하시던 어르신의 미소가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어르신들이 웃으시는 그 모습을 보는 것, 그게 바로 제가 이 일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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